이두(吏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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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 또는 이두문의 초기 형태는 삼국시대의 자료에서 발견된다. 고구려의 자료로는 4종의 고구려 성벽석각명(高句麗城壁石刻銘)이 있다. 병술명(丙戌銘)의 석각 하나와 기축명(己丑銘)의 석각이 둘, 그리고 연기(年記)가 없는 석각이 하나 알려져 있다. 정확한 기록연대는 알 수 없으나 김정희(金正喜)는 장수왕대(長壽王代)로 추정하였으므로, 이에 따르면 병술명석각은 446년, 기축명석각은 449년에 해당된다.
병술명석각은 다음과 같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 後部 小兄 文達節 自此西北行涉之[병술 12월 중에 한성(평양)의 후부 소형 문달이 지휘하였다. 여기서부터 서북 쪽으로 걸쳤다(걸쳐 축성하였다)].”
이 문체는 자연스러운 한문도 못 되고 그렇다고 우리말의 문체도 아니다. 곧, 한문 문체에 우리말의 요소가 가미된 속한문(俗漢文) 또는 변체한문(變體漢文)이라고 불리는 이두문체의 초기적인 형태이다.
이 가운데 ‘中’자는 정확한 날짜를 표시하지 않고 어느 기간을 나타내는 것인데 한문에서는 오히려 없는 편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후대의 이두에서는 ‘긔, 희’로 읽혀 처격조사의 표기로 쓰인 것이니, 이러한 국어적인 표현법이 ‘中’의 용법에 작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節’도 후대의 이두에서 ‘디위’로 읽히고 ‘때에’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之’자도 역시 한문의 용법으로서는 부자연스럽고 국어의 설명형 종결어미 ‘-다’의 영향을 받아 쓰인 것이다. 이 역시 후대에 이두로 발달한 것이다.
이 밖에 최근에 발견된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5세기 말?)가 있다. 여기에도 이두적인 표현들이 있다. 백제에도 이 계통의 문체가 존재했다. 백제 노래 가운데 「숙세가(宿世歌)」에 이두 표기가 있다.
신라의 삼국시대자료로는 서봉총은합우명(瑞鳳塚銀合杅銘, 451?), 울주서석(蔚州書石)의 원명(原銘, 5세기 말∼6세기 초)과 추명(追銘, 6세기 초∼중엽?), 단양신라적성비명(丹陽新羅赤城碑銘, 6세기 중엽) · 임신서기석명(壬申誓記石銘, 552 또는 주1 · 무술오작비명(戊戌塢作碑銘, 578?) · 남산신성비명(南山新城碑銘, 591?) 등이 있다.
이들의 문체는 국어적인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이들 가운데 ‘임신서기석’은 한자를 완전히 국어의 어순으로 배열하였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아왔다.
그리하여 서기체(誓記體)라는 특별한 명칭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幷’ · ‘之’와 같은 후대의 이두자가 쓰이고 있어서 이 역시 초기적인 이두문체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무술오작비명과 남산신성비명도 임신서기석의 문체와 같이 완전히 국어의 어순으로 표기된 것이다. 무술오작비명에서는 之 · 者 · 在 · 了 · 作 · 事 등이 후대의 이두적인 용법으로 쓰였다. 남산신성비는 현재 9개의 비가 발견되었는데 그 첫머리의 명문은 모두 동일한 문장으로 쓰인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辛亥年二月卄六日 南山新城作節 如法以 作後三年崩破者 罪敎事爲 聞敎令誓事之(신해년 2월 26일 남산신성을 지을 때에 만약 법으로 지은 뒤 삼년에 붕파하면 죄주실 일로 삼아 (국왕이) 들으시게 하여 맹세하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후대의 이두자에 해당하는 것을 다수 확인할 수 있으니 作 · 節 · 者 · 以 · 敎 · 事 · 爲 · 令 · 之 등이 그것이다. 이 시대의 이두문들은 속한문의 성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그 문체는 모두 문예문이 아닌 실용문으로 쓰였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도 삼국시대와 같은 속한문의 성격을 보여주는 초기적인 이두문이 있다. 감산사미륵보살조상명(甘山寺彌勒菩薩造像銘, 719) · 상원사종명(上院寺鐘銘, 725) · 인양사비문(仁陽寺碑文, 810) · 중초사당간석주명(中初寺幢竿石柱銘, 827)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한자의 어순을 우리말 어순으로 배열하고 이두에 해당되는 글자들도 사용하고 있으나, 모두 그 본래의 뜻에서 벗어난 용법으로 쓰인 예는 보여주지 않는다.
통일신라시대의 이두문은 토(吐)가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이 시대에 분명한 토를 보여주는 이두문 자료로는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명(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銘, 720) · 무진사종명(无盡寺鐘銘, 745) · 신라화엄경사경조성기(新羅華嚴經寫經造成記, 755) · 신라장적(新羅帳籍, 755?) · 갈항사석탑명(葛項寺石塔銘, 758) · 영태2년명석조비로자나불조상명(永泰二年銘石造毘盧遮那佛造像銘, 766) · 영천청제비정원명(永川菁堤碑貞元銘, 798) · 신라선림원종명(新羅禪林院鐘銘, 804) · 신라연지사종명(新羅蓮池寺鐘銘, 833) · 규흥사종명(窺興寺鐘銘, 856) 등이 있다.
이들 중 신라화엄경사경조성기의 본문은 347자나 되는 긴 글이 자연스러운 국어문장으로 해석되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經成內 法者 楮根中 香水 散厼 生長 令只彌”는 “경을 이루는 법은 닥나무 뿌리에 향수를 뿌려서 생장시키며”로 읽히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국어의 어순일 뿐 아니라, ‘經’ · ‘法’ · ‘香水’ · ‘生長’과 같은 한자어를 제하면 모두 우리의 고유어로 읽히는 것이다. 또, 이들 한자어도 차용어이므로 결국은 완전히 국어의 문장을 표기한 것이 된다. 이 조성기에 쓰인 토는 다음과 같다.
조사:者/(으)ㄴ, 以/로, 中/희, 那/나, 厼/곰.
어미:之/―다, 在之/겨다, 內之/―다, 在如/겨다, 內如/―다, (爲)哉/(ᄒᆞ)재, (爲)彌/(ᄒᆞ)며, 內弥/―며, (爲)內/(ᄒᆞ)ㄴ, (爲)內彌/(ᄒᆞ)며, (爲)內賜/(ᄒᆞ)ᄉᆞ, 賜乎/ᄉᆞ온, (爲)者/(ᄒᆞ며)ㄴ, (爲)以/ᄒᆞᆫᄋᆞ로, (令)只/―기, (令)只者/―긴.
기타:爲/ᄒᆞ, 令/시기(ᄒᆞ기?), 等/ᄃᆞᆯ.
이를 표기한 차자들을 문자체계별로 보면,
음가자:賜/ᄉᆞ, 乎/온, 那/나, 只/기, 弥/며, 哉/ᄌᆡ.
훈독자:爲/ᄒᆞ, 令/시기(ᄒᆞ기?), 在/겨, 等/ᄃᆞᆯㅎ, 者/(으)ㄴ, 以/로, 中/긔, 之/―다.
훈가자:如/다, 厼/곰.
과 같다. 이들의 계통을 보면 음가자 ‘那/나, 只/기, 弥/며’는 삼국시대부터 고유명사 표기에 사용되어 온 것이고, 훈독자 ‘爲/ᄒᆞ, 令/시기(ᄒᆞ기?), 在/겨, 以/로, 中/긔, 之/―다’는 삼국시대의 초기적인 이두문에서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는 말의 표기에 쓰여온 것이다.
이 밖의 차자는 자료상으로는 확인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쓰여오던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시대에 와서 새로이 나타난 것이다. 이로 보면 삼국시대부터 구별되어 쓰여오던 어휘표기법과 문장표기법이 이 토표기에서 합류되어 새로운 발전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훈독자 ‘者/(으)ㄴ, 中/긔, 之/―다’는 토로 발달하면서 그 본래의 뜻이나 기능에서 벗어나 훈가자로 변하여 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令只’는 말음첨기법(末音添記法), ‘厼’은 토표기에서 약체가 쓰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 표기법이 향찰로 발달하여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러나 주격 · 속격 · 목적격 등의 조사가 쓰이지 않았고 어미의 표기도 불완전한 표기여서 이 표기법이 곧 향찰표기법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 조성기 이후 10세기 초까지의 이두문에서 크게 새로워진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토표기법이 한층 발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영암서원종명(靈巖西院鐘銘, 963) · 고달사원종대사탑비음명(高達寺元宗大師塔碑陰銘, 977) 등이 속한문의 문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두문의 표기는 조선시대의 이두문과 거의 차이가 없을 만큼 발달하였다.
고려시대 최초의 이두자료는 명봉사자적선사능운탑비음명(鳴鳳寺慈寂禪師凌雲塔碑陰銘, 941)이다. 이는 비의 음명이지만 당시 도평성(都評省)에서 내린 첩문(帖文)을 새긴 행정문서이다.
이 이두문에서는 신라시대의 자료로서는 확인되지 않던 새로운 이두와 토, 그리고 새로운 차자를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대격조사 ‘乙/을’의 표기가 처음 나타나는 것이 주목되고, 설명형 종결어미 ‘之/―다’는 이 첩문 이후 얼마가지 않아 쓰이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 첩문이 신라시대 이두와 고려시대 이두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밖에 고려시대의 이두자료로는 태평2년명마애약사좌상명(太平二年銘磨崖藥師坐像銘, 977) · 정도사조탑형지기(淨兜寺造塔形止記, 1031) · 통도사국장생석표명(通度寺國長生石標銘, 1085) · 지원18년노비문서(至元十八年奴婢文書, 1281) · 지정14년노비문서(至正十四年奴婢文書, 1354) · 지정17년백암사첩문(至正十七年白巖寺貼文, 1357) · 홍무11년백암사첩문(洪武十一年白巖寺貼文, 1378) · 홍무19년남종통기의 노비문서(洪武十九年南宗通紀-奴婢文書, 1386) · 이성계호적(李成桂戶籍, 1391) 등 60여 종이 있다.
이 가운데서 ‘정도사조탑형지기’는 연대가 이른 11세기의 기록이면서도 장문(長文)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두의 다양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이 시대에 이미 이두의 표기법이 완성되어 조선 말기까지 그 이상의 발전은 없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언어의 개신(改新)에 따른 변화가 있었을 따름이다. 이 조탑기는 첫머리의 발원문(發願文) 부분이 초기 이두문이고, 그 밖의 조탑과정에 대한 설명은 모두 국어의 표현으로 되어 있다.
이 조탑기 이후의 고려시대 자료들은 새로운 단어들의 예를 추가할 수 있을 뿐, 표기법이나 문체상의 차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이두의 사용범위가 한문에 밀려 좁아지기 시작하여 12세기 이후는 탑이나 불상 등의 조성기에서는 이두문을 발견하기 힘들다.
조선시대의 이두문은 비교적 많은 자료가 남아 있어서 자료가 부족한 고려시대나 더 나아가서는 신라시대에 이두문이 사용된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문체상으로는 한문의 영향을 받아, 심한 것은 한문에다가 구결의 토를 단 것과 같은 이두문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 초기의 이두문으로 주목되는 것은 『대명률직해』(1395)와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1415)이다. 이것은 이두문으로 백성들의 실생활에 필요한 한문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번역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의 언해(諺解)와 맥이 닿는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1541)은 한문을 이두문과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당시에 이두와 한글을 쓰는 사회계층이 달랐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두문은 주로 문서로서 사용되었다. 주2』(1395) · 주3』(1401) · 『병조조사첩(兵曹朝謝帖)』(1409)은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문서를 이두문으로 기록한 것이다. 신하나 백성이 왕에게 올리는 문서인 상언류(上言類) · 정사류(呈辭類) · 장계류(狀啓類)가 이두문으로 쓰였다.
또한, 관(官)과 관 사이에 주고받는 첩정문(牒呈文) · 관문(關文) · 단자(單子), 형조의 문서인 추안(推案)이나 근각(根脚), 민간에서 관에 올리는 원정류(原情類) · 소지류(所志類), 이에 대한 관의 회답인 제사(題辭), 백성들 상호 간에 주고받는 문권류(文券類)인 명문(明文) · 성급문(成給文) · 화해문기(和解文記) · 유서(遺書) 등과 고목류(告目類) · 절목류(節目類) · 단자류(單子類)가 이두문으로 쓰였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국어를 표기하기에 불완전한 이두를 정음으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 그 중요한 목적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훈민정음 창제 후 이과(吏科)의 인재를 뽑을 때 정음을 시험으로 보게 하기도 하고, 세종 자신이 대간들의 죄를 의금부와 승정원에 알릴 경우에 정음으로 써서 보낸 일도 있었다. 이 밖에도 실록에 나타난 기록들을 보면 이두로 기록되어 오던 영역이 정음으로 대체된 경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두로 기록되어 오던 영역이 한문으로 대체된 것이 있다. 세조 때에는 동반(東班) · 서반(西班) 5품 이하의 고신첩(告身牒)이 이두로 쓰여 왔었는데, 한문인 이문(吏文)으로 대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종래 이두로 쓰여 오던 영역이 정음과 한문에 의하여 축소된 것임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한문 · 이두 · 정음이 공존하게 되어 이것이 나중에는 사회적인 계층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다. 즉, 선비들은 한문, 중인(中人)들은 이두, 부녀자나 서민들은 정음으로 결부시키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이 백성들에게 교서를 내릴 때, 선비들은 한문인 원문 그대로 보내어 알리게 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 이두를 넣어 방문을 만들어 붙이고, 이것을 또 정음으로 번역하여 촌민(村民)들도 모두 알도록 하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이두가 사회적인 계층과 결부됨으로써 『유서필지』에서는 서리들이 사용하는 문체를 ‘이서지체(吏胥之體)’라는 문체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이두는 기실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훈민정음 이전부터 써 내려오던 관습으로 인하여 유지되어 오다가, 사회적으로 서리계층(胥吏階層)이 형성되면서 그들의 문체로 굳어져 19세기 말 국한문혼용체(國漢文混用體)로 대체될 때까지 사용되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