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터넷신문≫ 중국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여인들4
- ️Mon Mar 16 2015
복귀인 옥금(李玉琴)은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까?
김도연 기자 | 기사입력 2015/03/17 [05:06]
중국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여인들4
복귀인 옥금(李玉琴)은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까?김도연 기자 | 입력 : 2015/03/17 [05:06]
【경기포스트】통통한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매력적인 15세 소녀 옥금(玉琴), 지금이라면 부모 품에서 응석 부리고 친구들과 놀기 더 좋아 할 나이에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보다 22살이나 많은 중국의 마지막 황제의 후궁으로 간택됐다. 명현귀비(明賢貴妃) 옥령(玉齡)이 세상을 떠나고 다시금 부의(溥儀) 옆자리는 공석이 됐다. 일본은 또다시 일본 여인을 맞을 것을 강요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와 위치를 잘 알고 있던 부의(溥儀)는 장춘시(長春市) 한 소학교에서 중국 출신의 새 후궁을 간택한다. 새로 간택한 후궁은 평범한 집안의 한족(漢族) 출신인 복귀인(福貴人) 옥금(玉琴)이다. 부의(溥儀)는 ‘복(福)’자를 작호(爵號) 내리며 옥금(玉琴)에게 “앞으로 불행한 일이 생기거든 너의 복(福)으로 이겨내라”고 당부 했다.
부의(溥儀)는 앞전의 황비(皇妃)문수(文绣)와의 이혼 그리고 황후(皇后) 완용(婉容) 일을 겪으며 제발을 방지하고자 옥금(玉琴)을 통제하기 위해 21조항을 만들어 그녀에게 강요했다. 21개 조항의 내용은 “무조건 청왕조(淸王朝)의 예법을 지키고; 부의(溥儀)의 말에 무조건 순종 한다; 그녀가 주고받는 모든 편지는 부의(溥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평생 친정부모와의 만남은 물론 친정집에 갈 수 없다; 수심이 가득한 혹은 괴로운 표정을 해서는 안된다“는 등 조항들은 하나같이 15세 소녀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조항들로 가득했다. 이런 조항들로 인해 부의(溥儀)가 기분이 좋을 땐 옥금(玉琴)에게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게 하였고,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땐 그녀에게 욕을 하거나 빗자루로 때리는 등의 폭행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부의(溥儀)는 폭행 후에도 21개의 조항을 대며 웃는 얼굴을 강요했다. 부의(溥儀)는 그녀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었던 듯 하다. 그의 자서전인<나의 반평생>에 다른 부인들의 비해 복귀인 옥금(玉琴)에 대한 언급이 많지 않다.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사건이후 일본은 항복을 했고, 일본의 후견으로 만주국(满洲國) 황제로 있던 부의(溥儀) 또한 황제에서 쫒기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옥금(玉琴)은 도망자가 된 부의(溥儀)를 기다리다 지쳐 친정집으로 돌아가지만 봉건적 풍습에 젖어있던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천진(天津)의 부의(溥儀)의 친척집으로 보내고 그녀는 그 곳에서 갖은 구박과 고생을 하다 스스로 살 길을 찾아 집을 나선다.
장춘(長春)의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중국 정부의 교육과 도움으로 장춘의 도서관 관리원으로 일하게 되고 더 나아가 훗날 장춘시(長春市) 정치협의회 2급의원까지 된다. 옥금(玉琴)은 1955년 요녕성(遼寧省) 무순(撫順)전범관리소에 갇혀있던 부의(溥儀)를 찾아가 이혼을 요구했다. 이혼 후 그녀는 길림성방송국에서 일하는 황육경 선생과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다 2001년 향년 73세로 지병인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봉건적 제도로 여자를 옭아매는 과거와 스스로의 재능을 마음껏 표출했던 현대라는 시대를 살아오면서 비록 한 때는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겼을지 모르나 그녀의 말년 인생은 어쩌면 그녀의 작호의 복(福)자 의미처럼 인생의 모든 어려움과 역경을 극복하고 행복이라는 두 글자로 인생을 멋지게 장식했다. <저작권자 ⓒ 경기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